

사람들이 오고 싶어하는 교회
“왜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는가? Why Nobody Wants to Go to Church Anymore: How 4 Acts of Love Will Make Your Church Irresistible’(T.&J. Schulz)라는 책에 보면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되는 이유가 크리스찬들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적습니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사랑의 능력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받은 사람이 그 사랑을 전달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 영양실조에 걸려있는 지도 모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건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일 수도 있고, 사랑을 받을 줄 모른다는 표현일 수도 있어요.
교회가 탕자의 비유(눅15장)에 나오는 집나갔던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도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을


작은 차이가 삶을 구별시킵니다
요즘 TV에서 소위 잘 나가는 연예인들은 늘 통통 튀는 행동을 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끕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보니까 비즈니스 전략을 세울 때에도 마찬가지로 많은 메뉴보다는 오히려 자신 있는 몇가지 메뉴만 골라서 차별화를 두고 소비자의 시선을 끌면서 불경기 속에서 살아남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역시도 이와 같은 차별화를 보여준다는 것에 주목해 봅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을 끄는 무언가를 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고(창22장) 모세는 은퇴해서 쉴 수 있는 나이 80세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힘든 여정을 선택했습니다(히11:25). 다윗은 단지 물맷돌 5개만 들고도 거대한 장수 골리앗과 싸우려고 당당히 그 앞에 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삶은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구별된 인생이 되는 겁니다.
구약시대 ‘한


제 그릇이 더 커지면 좋겠습니다
한 스승이 한 젊은 제자를 두었는데 제자는 무슨 불만이 그리 많은지 하는 일마다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제자를 불러서 소금 한 사발과 마실 물을 한 컵 가져오라고 시키더니 스승은 사발에 있는 소금을 컵 속에 넣은 다음에 그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물맛이 어떠냐?” 스승의 질문에 제자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합니다. “예, 무척이나 짭니다.” 스승은 곧이어 제자를 호수로 데려가서 조금 전과 같은 양의 소금을 호수에 집어넣고 휘휘 저어 그 물을 마시게 한 다음 다시 물었습니다. “맛이 어떠냐? 짜지 않느냐?” “짜다니요? 전혀 안 짭니다. 그저 시원합니다.”라고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고통은 소금과 같다. 짠맛의 정도는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지. 네 속에 고통이 있다면 네가 컵이 되지 말고 호수가 되어라.”
이번 주간에 제 아내가 대뜸 저에게 ‘요즘 당신이 아이들에게 화가 많아졌어요.’ 한


언제쯤 철이 들까요?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터로 가고 있는데, 웬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휘두르며 수레에 덤벼드는 겁니다. 마부에게 벌레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것은 사마귀라는 벌레입니다. 이 벌레는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을 모르는데, 제 힘은 생각하지도 않고 적을 가볍게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마귀가 수레를 가로막고 선 것처럼 제 분수도 모르고 무모하게 나서는 것을 “당랑거철”이라 부릅니다.
나이가 들고 성숙해진다는 것을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작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아는 것이 성숙해지는 과정 같습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과 비교했을 때 티끌 정도로 작고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미처